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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거울에 투영된 존재의 편린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이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운영하는 창동 스튜디오 국제교환 입주작가 프로그램(제 4기)에 참석하고 돌아온 작가 나진숙의 귀국 보고전 형식이다. 전시 작품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설치와 페이퍼캐스팅, 그리고 영상이 어우러져 유기적인 조합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큰 틀에 있어선 2005년 개인전(창 갤러리)과의 연장선에 있다. 다만 여기에다 물에 대한 의미론적인 해석을 더함으로써 작품의 지평을 확장시키고 있다. 표면적으로 이는 작가가 입주해 있던 네덜란드의 지역적 특수성, 즉 육지가 수면보다 낮은 것이

반영된 듯하며, 보다 근본적으론 그 자체 작가의 심상 이미지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러니까 작가의 작업에서의 물은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무의식적 실체를 표상하는 기호인 것이다.

 

 

나진숙의 작업에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마치 모자이크처럼 단위원소들의 조합을 통해 전체적인 형상을 축조해낸다는 점이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자른 나무판(송판)이나 압축합판 또는 검정색의 압축고무판 위에다 저부조(低浮彫) 형식의 각종 이미지를 새겨 넣은 후, 이를 사방으로 조합해낸 것이다. 비록 그 크기가 동일한 단위구조의 조합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표면에 새겨진 이미지들은 하나같이 틀린 것들이다. 씨앗, 꽃, 나뭇잎, 구름, 물결, 빗방울, 새, 알 등의 그 실체를 알아볼 수 있는

구상적인 이미지가 있는가 하면, 다만 그 실재를 암시할 뿐인 것도 있고, 추상적인 문양이거나 아예 형태가 없는 굴곡진 표면으로써 이미지를 대신한 것들도 있다. 이 이미지의 편린들이 서로 어우러짐으로써 거대한 전체 형상을 빚어내고 있는 작가의 작품은 그 자체 완결된 형상이기보다는 임의적으로만 한정된 것으로 보이며,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덧붙여 나갈 수 있는 그 자체 열려진 체계를

실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일련의 작업들은 우주의 존재원리로서의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보여주는가 하면, 우주의 생성원리로서의 단자

(모나드)에 대한 인식을 느끼게 한다. 즉 세계는 최소단위원소들의 집합으로 구조화돼 있으며, 이질적인 계기들이 각각의 차이를

넘어 조화를 이루는 것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들 작업은 그 생리가 일상의 그것을 닮아 있다. 즉 매일 같은

날들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실상 이때의 반복은 그 속에 차이를 내포한 반복인 것이며, 작가는 이를 작업으로써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일종의 사사로운 일기처럼 읽혀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일상의 기록, 시간의 기록, 의식의 망에 포착된 사유의 조각들의 기록일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무의식의 지층으로부터 길어 올린 욕망과 상처의 편린들을 기록한 것일 수도 있다.

 

이는 일종의 자기 반성적인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며, 작업에 나타난 낱낱의 이미지들을 의미를 실어 나르는 상징의 형태로서 읽게

만든다. 예컨대 알(卵)이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을 암시하는가 하면, 새는 자유와 함께 현실에 붙박인 존재의 한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로써 새는 결핍과 결여에 바탕을 둔 인간 실존을 대리하는 일종의 반어법(아이러니)의 한 표상으로서 읽혀진다. 조개 모양의 화석이 헤아릴 수조차 없는 시간 저편의 아득한 태고적 풍경과 대면케 하는가 하면, 양식화된 구름문양이 전통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도 한다. 음(陰)과 양(陽)의 우주를 운행하는 두 힘의 동세가 엿보이고, 존재를 스치는 바람의 결이 느껴진다.

 

이미지들을 조합해내는 방식이 전통적인 테라코타 벽면 장식을 떠올리게 하는가 하면,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일종의 인식 지도를 재구성한 듯 보인다. 즉 나진숙의 작업은 이미지의 편린들로 조합돼 있으며, 이를 짜맞춰 나가는 행위와 과정이 마치 퍼즐 맞추기와 닮아 있다. 낱낱의 이미지로서의 단위원소들은 작가의 자아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을 대리하며, 의미론적으로 서로 이질적이거나

연관된 요소들의 집합으로써 구조화된 작가의 주체를 대리한다. 이는 인격의 구성요소들을 복원하는 행위에 맞닿아 있으며, 자아를 재구성해내는 기억의 불완전한 재생력을 떠올리게 한다. 타자에 해당하는 것들, 이질적인 것들과의 상호간 영향사로 교직된 주체의 형성과 그 복원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이외에도 작가는 이렇게 이미지가 새겨진 판을 틀 삼아서 그 위에다 종이죽을 대고 떠낸다. 일종의 페이퍼캐스팅으로 범주화할 만한 이 일련의 작업들은 한지 특유의 부드러운 표면질감과 함께, 전통적이고 지역적인(한국적인) 미적 감수성에 대한 공감이 느껴진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는 일종의 장르 간 경계 넘나들기에도 그 맥이 닿아 있다. 그러니까 저부조 형식을 통한 작품은 입체에 바탕을 둔 조각과 평면에 바탕을 둔 회화와의 경계 선상에 위치해 있으며, 페이퍼캐스팅 기법을 통한 작품에서는 주조(틀)에 바탕을 둔 조각과 판을 매개로 하는 판화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장르 간 경계 넘나들기는 영상의 도입으로 인해 더욱 강화된다. 즉 페이퍼캐스팅으로 떠낸 이미지를 벽면에다가 설치하고,

이를 스크린 삼아 그 위에다가 물을 소재로 한 영상작업을 투사한 것이다. 이때 사운드를 곁들인 물 영상이 그 이면에 놓여진 화면의 캐스팅된 이미지를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한다. 영상으로서의 물의 이미지는 말하자면 그 이면의 이미지에 연동된 것이며,

여기서 물의 두 속성인 반영성과 흐름이 극대화된다. 반영성과 관련하여 물은 자기 외부의 이미지를 투사하는 대신에, 작가의 내면을 투영하는 일종의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내면적이고 무의식적인 거울의 형태로서 현상한다. 그 자체 기억의 편린들이며 사유의

조각들이랄 수 있는 내면의 이미지가 수면 위로 드러나 보이기도 하고, 수면 아래로 잠수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물처럼 시간의

흐름과 함께 흘러가고, 잊혀지고, 사라진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뒤에 남겨진 최소한의 흔적으로써 다만 한때의 실체를 암시하고

증거해줄 뿐이다. 작가는 말하자면 물 영상을 자기 반성적인 계기로 유도하는 일종의 심리적인 거울처럼 사용하고 있으며, 그 거울에 투영된 기억과 사유의 편린들이 재구성되거나 희미해져 가는 과정을 통해서 주체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물은 그 의미가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원형질에 맞닿아 있고, 흘러가고 흘러오는 존재의 순환적인 구조와 생리에 맞닿아

있다.

 

 

나진숙은 이번 전시의 주제를 <결 - 숨결, 물결, 바람결>로 칭한다. 이때의 결은 존재의 구조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드러내는데, 즉

존재란 단일의 총체로서 구조화된 것이기보다는 여러 이질적인 결들이 중첩된 다중적인 구조, 다층적인 구조, 다의적인 구조로서

드러난다. 이는 그대로 질 들뢰즈의 주름과도 통하는 것이다. 즉, 존재는 주름의 표면에 드러나 보이는 의식적인 주체인가 하면,

주름의 이면에 숨겨진 무의식의 주체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존재는 인식의 안쪽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언어적인 주체인가 하면, 인식의 안쪽으로 불러들일 수는 없는 비언어적인 주체, 욕망의 주체이기도 하다. 주제에 나타난 ‘결’이란 말하자면 존재의 결인 것이며, 이는 그대로 여러 이질적이고 심지어는 서로 상반되기조차 하는 존재의 중첩구조를 드러낸다.

 

또한 결은 전통적인 미적 관념인 기운생동(氣韻生動) 중 운과 관련되며, 리듬, 동세, 생명의 박동, 바이오리듬과 관련이 깊다. 작가는 존재의 숨결 속에서, 수면에 일렁이는 파문에서, 그리고 나뭇잎을 희롱하는 바람에게서 이 리듬의 단서를 발견한다. 리듬은 파문처럼 존재의 안쪽으로부터 바깥쪽으로 퍼져나가기도 하고, 공명처럼 존재의 바깥쪽으로부터 안쪽으로 잦아들기도 한다. 이렇듯 나진숙은 존재의 결, 주름, 리듬의 주제의식을 통해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떨림 현상을, 그 생명에의 환희를 전달해준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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