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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숙 작업의 결을 따라

 

류한승(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나진숙은 나무, 고무, 닥종이, 하드보드, 글루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다. 게다가 이 재료들을 다루는 기법 역시 다양하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나오는 작품은 어느 한 장르나 어느 한 매체로 한정되기 보다는 평면, 부조, 영상, 설치 등 장르와 장르 사이를 횡단한다.

거기에 작업에 등장하는 다양한 이미지들까지.

이와 같이 그의 작품에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혼재하기 때문에 다소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나진숙은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을

십분 발휘함으로써 이러한 각양각색의 것들이 서로 어울려 종합적인 의미망을 띠게 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우리와 공감할 수

있도록 내면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추구하는 예술적 의도와 조형적 특징은 어떤 것일까? 먼저 나진숙의 기법을 살펴보자. 그는 나무판 또는 고무판을 칼로 파고 다듬어 이미지를 새기며, 이미지가 새겨진 나무판 혹은 고무판을 닥종이로 캐스팅하기도 한다. 더불어 최근에는 고무판

또는 하드보드에 글루를 붙여 형상을 만들기도 한다. 이런 기법들에 의해, 결과적으로 완전히 매끈한 화면이 아닌 울퉁불퉁한 부조와 같은 형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나진숙은 평면보다는 입체에 가까운 형태를 만들어, 그 미묘한 높이 변화에 의한 강약을 탐구한다. 이미지 자체가 내포하는 의미를 유보하더라도, 형식적인 측면에서의 독특함이 돋보인다. 나아가 그는 작품 위에 영상 이미지를 비추기도 한다. 작품에 본래 있던 이미지들과 영상의 이미지들이 겹쳐지면서 섞인다. 여기서도 분명한 것은 영상 이미지라는

물리적인 층, 이른바 레이어가 더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진숙은 또한 고무판, 하드보드의 검은색과 닥종이, 글루, 나무의 흰색을 선택하여 색채의 대비를 실험한다. 근래에는 파란색

화면에 반짝이는 흰색 글루를 접착시켜 흰색과 파란색의 대비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동시에 그의 작품 안에는 일종의 따뜻함이 있다. 그는 나무에서 오는 따뜻함, 고무라는 공업재료에서 오는 차가움, 닥종이에서 오는 따뜻함, 컴퓨터 미디어에서 오는 차가움 등

따뜻함과 차가움을 교차시킴으로써 오히려 따뜻함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이렇게 나진숙의 작업에는 평면과 입체, 검은색과 흰색,

따뜻함과 차가움, 자연재료와 공업재료, 어둠과 밝음 등 뚜렷한 강약이 존재한다.

 

작가는 지난 7월 개인전 제목을 “결”이라고 붙였다. 그간 나진숙은 작품명으로 숨결, 바람결, 물결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부조 위에 영상을 비출 때 물결과 바람결이 느껴지는 이미지를 활용하기도 하였다. 사전에서 ‘결’이란 나무, 돌, 살갗 따위에서 굳고 무른 조직의 부분이 모여 이루어진 바탕으로 정의되며, 때때로 숨결, 물결처럼 서로 다른 층의 높낮이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처럼 ‘결’이란 강약

혹은 높낮이의 상태를 지시하며, 고정되고 경직된 것보다는 역동적이고 유연한 것에 가까운 의미이다. 작가는 여기에 시간적 개념을 첨가한다. 그 시간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간이다. 우리가 경험한 시간은 기억과 회상으로 대변되며, 이것들이 포개지고 쌓여 ‘결’이 된다. 그리고 작품의 구체적인 이미지들은 그러한 기억과 회상이 가능할 수 있도록 촉매제의 역할을 수행한다.

나진숙은 정사각형 블록 형태를 자주 애용한다. 하나의 블록에 하나의 이미지가 있기도 하지만, 여러 개의 블록이 합쳐져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기도 한다. 당연히 이 이미지들은 각각 고유의 의미와 상징을 가지지만,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보다 커다란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이는 여러 파편들이 이어져 총체적 의미가 생성되는 것으로, 마치 우리의 인생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미지들이 서로 짝이 맞기도 하고, 맞지 않기도 한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이 항상 파노라마처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엉뚱한 것이 나오기도 하고. 그런데 산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나하나는 서로 짝이 안 맞을 수 있지만, 계속 판을 이어나가서 크게 만들고, 그 판을 멀리서 봤을 때 하나의 커다란 이미지가 된다.” - 작가 노트 -

 

이제 정사각형 블록에 등장하는 각각의 이미지들을 살펴볼 차례이다. 대체적으로 이미지들은 아련한 추억과 관련되기도 하고, 미래의 희망과 연관되기도 한다. 또한 자유로움에 대한 동경과 엄마 품과 같은 따뜻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새는 작가를 암시하는 경우가 많다. 씩씩하게 날아가는 새도 있지만, 퍼덕거리는 새도 있다. 나비는 날아가고 싶은 욕망을 상징하며, 배 역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의지를 시사한다. 배 옆에 구름이 있는 경우도 있는데, 배와 구름이 함께 있다는 것은 환상적이고 꿈같은 느낌을 표현한 것이다. 조개는 단단한 껍데기가 특징적인데, 작가는 그 껍데기 속에 숨고 싶은 마음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알은 쉽게 알 수 있듯이 탄생을 지시하며, 빗방울은 모든 것을 씻어 내리는 것을 말한다. 물방울은 마치 아침 이슬 같은데, 새로운 아침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꽃에는 거창한 의미가 있는 것보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봄날로 돌아가고 싶은 동심이 담겨져 있다. 이는

어렸을 때 뒷동산에서 보았던 꽃들인 셈이다.

 

나진숙은 비교적 다채로운 재료와 기법을 사용한다. 물론 나무와 고무판에 이미지를 새기고 캐스팅한다고 해서 그를 조각가라고

부르고, 마찬가지로 영상을 도입한다고 해서 그를 영상작가로 부르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방법들은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 즉 내용을 지칭하기 위한 것들이다. 사실상 형식과 내용의 조화는 미술에 있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오히려 너무나 진부한 것일 수 있다. 우리가 나진숙의 작업에서 생각해야할 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는 다른 어떤 작가보다도 그

내용에 가장 어울리는 형식을 끝임 없이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노력에는 작가의 예리하고 미묘한 감성이 내재한다. 내용과 형식의 편안한 조화 속에서 그의 이야기는 관객들에게 다가가 소통하고자 한다.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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