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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반성을 통한 자기정화

 

윤두현(독립큐레이터)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라는 말처럼 지금도 우리는 매순간 공기를 들이키듯 기억을 빚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내일의 삶을 추동하고 그 심연을 넓힌다. 그것은 아직도 선명한 사랑의 생채기이거나 혹은 가슴 떨리는 설레임일 수 있으며, 아니면 이와는 다른 류의 어떤 경험 혹은 감정의 흔적일 수도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쩌면 그것은 별똥별이 지거나

보름달이 맑을 때 기원의 내용은 각기 다를망정, 소원을 비는 그 행위 자체는 보편적일 수 있는 것처럼 보다 집단적인 무의식의

구조를 드러내는 확장된 기억일 수도 있다. 나진숙은 이와 같은 ‘기억’을 작업의 주요 토대로 삼는 작가다.

 

그는 기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반성한다. 여기서 그가 반성하는 기억이란 자신의 삶에서 비롯된 것일 뿐 아니라

동일한 공간 안에서 함께 호흡하며, 공동의 삶을 꾸려가는 우리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 작가가 이렇듯 기억의 반성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단편적으로 지나가버린 과거를 회상하거나 그리워하는 것같이 과거지향적이며 수동적인 차원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삶의 가치와 의미를 현재와 미래의 차원에서 고양하고 독려한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적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나진숙의 작업은 자기정화(self purification)며, 구도(seek after truth)에 가깝다.

 

작은 부분들이 모여 큰 하나를 이루는 기억의 기본구조처럼 그의 작업들은 작은 판 위에 새겨진 상징들이 모여 큰 전체를 구성한다. 한편 이들은 나무 조각이나 고무판 위에 양각이나 음각으로 새겨진다. 또한 닥종이 위에 옮겨진 채 영상작품과 조화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듯 기억의 반영물인 그의 작품들은 평면에 국한하지 않고, 3차원의 입체적인 공간을 적극 창출한다. 최근 영은미술관

영은창작스튜디오의 입주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이제 캔버스와 수지 등을 활용하여 기억의 각 부분을 크게 확대한다.

 

구름, 조개, 알, 물방울, 별, 배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각각의 형상들은 구체적인 기억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이를 승화시켜

지고의 세계를 담아낸 자연이며, 관념이다. 이런 이유로 그의 은유된 기억들은 특정한 리얼리티를 담아낸 구구절절의 서술구조를

띄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형상들 자체가 가진 고유의 상징성으로 말미암아 그의 작품들은 결코 건조하지 않고 풍부한 서술성으로

충만하게 된다. 이는 마치 긴 시간의 흔적을 품고 있는 고택의 이곳저곳에 새겨진 문양처럼 그 자체로 개인의 기억을 넘어 가슴과

가슴으로 이어져 내려온 기원이나 정화와 같은 공동체적 무의식의 구조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현대미술에 있어서 기억은 어떻게 다루어져 왔는가? 사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를 일일이 언급하기에 그 범위는 너무나 넓고

광범위하다. 일차적으로 그리는 행위 자체는 설령 대상이 바로 눈앞에 있다고 해도 본 것을 기억해 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으로 이는 오랫동안 미술의 중심 화두로 자리 잡아온 재현의 문제와도 맥이 닿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원론적인 입장에서

현대미술은 더 이상 재현(기억) 자체를 궁극의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기억은 이제 그것이 개인의 것이든 공동의 것이든 ‘반성’이라는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예술 나아가 인간의 존재 방식 자체를 회의하고 반성했던 현대미술의 선각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진숙의 작업은 안과 밖으로 동시대적 미술의 요건을 충족한다. 하지만 요건의 충족이 곧 완성은 아니다. 보다

구체적인 대화와 소통의 장으로 나와 우리 안에서 나를 기억하고 반성하는 지평의 확장은 다소 아쉽다. 반면 기억을 별달리 반성하지 않고, 순환 반복하는 가벼움이 오히려 주목받는 요즘의 상황에 비춰보면 그의 작업은 요란한 수면 아래의 깊고 푸른 심연을 모처럼 실감케 하는 반가운 햇살이다.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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